우리들의 이야기

2 천 년전, 오늘

작성자
박진용
작성일
2020-04-05 10:09
조회
1020

2천 년 전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봉헌하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신앙의 정체성,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코르나-19라는 지금’을 묵상하는 시간이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의 정점인 부활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향했던 교회의 결과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호산나”로 환호했던 군중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배신의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신의 아픔을 거부하지 않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타로 오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존재이유였습니다. 그로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구세주로 인정받고, 고백되었습니다.

2천 년 전, 신앙의 공동체에게 ‘지금’은 ‘인간의 배신과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눈앞에 주어진 코로나-19는 신앙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신앙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힘겹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이 위기는 2천 년 전, 군중의 배신을 받아들여야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군중의 환호, 예루살렘이 거부와 배신,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믿는다는 하느님을 거부하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끌어들여 그들의 야욕을 챙겼고, 기복신앙을 빌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개인의 기복’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고, 힘겹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외면하며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멀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골고타로 향했던 십자가는 지금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골고타로 오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거부하고 누군가는 짊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무너지고 있고, 누군가는 희망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절망하며 하느님을 거부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렇게 절망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배려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짊어지는 그 누군가가 바로 ‘지금의 나’요, 희망으로 버티는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이며 절망하며 도망가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지 않으며 배려하고 기도해주는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예수님의 사순을 전례적으로 묵상하지는 못했어도 현실 속에서 더 처절한 사순시기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까지 틀 속에 박혔던 사순시기의 묵상을 넘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였고, 신앙의 아픔을 보았고, 아픔을 살았습니다. 전례를 넘어 삶 속에서 매일의 시간 동안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수난, 교회의 수난, 그리고 우리 신앙의 수난을 처절하게 경험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고백해야 했던 초대교회, 신앙고백이 어려웠던 그 아픔 속에서 그들은 신앙고백을 이루었습니다. 그분들이 고백했던 신앙의 포인트를 이제는 우리가 살아야할 시간입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에게는 코르나-19라는 십자가가 그 신앙의 포인트는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시간 동안, 미사재개 만을 기도했다면? 우리가 코로나-19의 빠른 해결만을 기도했다면? 코로나-19의 아픔을 사는 이 땅의 민초들을 위한 기도만을 했다면? 경기가 좋지 않아서 하루라도 빨리 경제가 정상이 되기만을 기도했다면? 코로나-19의 위험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더 많이 걱정했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 대전에 가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속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다스리라.’는 하늘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인류는 그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픈 현실을 벗어나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질서를 통하여 보여주셨던 그 질서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타협은 군중을 끌어들여 걸림돌인 예수님을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환호하던 군중의 돌변은 지금의 우리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소”라는 빌라도의 말처럼 우리도 지금 신앙이 아닌 것과 너무 많은 타협을 이루고 있습니다. ‘타협’은 ‘신앙과 세상의 위기에 책임을 회피’합니다. 코로나-19의 문제가 마치 저급한 한국인을 모욕하는 백인의 횡포처럼, 중국에서 시작된 코르나-19의 책임을 중국으로만 돌리고, 정부나 지자체의 늑장 때문에, 혹은 주변사람들의 무분별한 부주의 때문에 해결되지 않고, 때론 우리의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이 수난의 길을 주셨는지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만 받아들이는 많은 경우가 타협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코로나-19와 함께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군중이 바라본 예수님을 묵상하며,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 세상이 바라보는 신앙을 묵상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거울을 주셨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의 역사 속에서 “거울”입니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그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속살이 아름다웠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운 죄인이요, 나약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코로나-19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주님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이 지독한 아픔, 코로나-19를 기억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침묵하셨던 하느님처럼, 이 지독한 아픔에 침묵으로 이 땅을 지켜보시는 그 하느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를 넘어 “하느님, 당신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는 예수님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이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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