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분과

2019년 9월 15(주일) 견진교리 1차인 유탁준라파엘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작성자
교육분과
작성일
2019-09-21 08:10
조회
282
시한편을 읽으며 시작하겠습니다.

나무에 대하여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유탁준 신부입니다.

지금 현재 저는 안식년 중에 있습니다.

안식년은 그야말로 잘 쉬어야 하는데, 주임 신부님께서 이리하시니 쉬지도 못합니다.

내년이면 벌써 사제 생활 30년이 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어떠한 말을 한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임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냥 저 자신에게 하는 말로 치부하고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지방리 공동 사제관에서 저를 포함해서 7분의 신부님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일상을 타이트하게 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저를 맡기며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한 석 달가량은 함께 지내고 있는 신부님과 둘이서 사제관 뒷산(장태산)에 산책길을 내고 있는데, 산세가 험해서 세상에 쉬운 일이 없더라구요.

왕복 약 30~40분 정도 거리의 길을 내는 것은 끝이 없더라구요.

길을 내다보면 밤사이에 여러 종류의 산 주인들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그리고 확인되지 않는 다른 동물들이 각자의 시간에

전체 산을 휘 젖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낮에는 인간의 세계에 산들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물론 낮에도 산모기와 진드기, 초파리 등의 성화도 무시 못합니다.

그 가운데 초록의 향연과 바람이 빚어내는 오케스트라의 하머니가 마음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자연과 동물과 길을 내는 일 속에서 보이지 않는 만남의 손길을 느낍니다.

만남! 만남이 없는 삶은 없지요.

만남을 통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지요.

우연의 만남이 있을 수 있고, 필연의 만남도 있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연과 필연을 나누는 것은 우리,

즉 인간의 편에서 나눈 것이 아니겠는가?

본래 필요 없이 발(發. 생겨나는) 하는 것은 없다 했습니다.

만남은 오늘의 나 자신의 반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아이러니 하게도 ‘떠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머물면’ 새로운 만남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형성되지 않으면 ‘성장’도 멈추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만남’,‘떠남’ 혹은 ‘떠남’ 과 ‘만남’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甁)에 물을 담으면 ‘물 병’ 이 되고,

꽃을 담으면 ‘꽃 병’, 꿀을 담으면 ‘꿀 병’ 이 됩니다.

통(桶)에 물을 담으면 ‘물 통’ 이 되고,

똥을 담으면 ‘똥 통’,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 통’이 됩니다.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 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 그릇’, 김치를 담으면 ‘김치 그릇’이 됩니다.

병(甁)이나 통(桶)이나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좋은 쓰임으로 쓸 수도 있고 허드레 일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꿀 병이나 물통이나 밥그릇과 같은 좋은 것을 담은 것들은

자주 닦아 깨끗하게 하고 좋은 대접을 받는 대신,

좋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담은 것들은 한 번 쓰고 버리거나,

가까이 하지 않고 오히려 멀리하려는 나쁜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 통, 그릇들은

함부로 마구 다루면 깨어지거나 부서져서 곧 못쓰게 도기 쉽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도 이것들과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좋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아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대접’을 받느냐, 못 받느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분노, 시기, 질투 등 좋지 않은 것들을 가득 담아두면

욕심쟁이, 심술꾸러기가 되어 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고,

감사, 사랑, 겸손 등 좋은 것들을 담아두면

남들로부터 대접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 대접을 받느냐,

‘금수(禽獸)만도 못한 놈’ 소리를 듣느냐 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떠남’과 ‘만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떠나라 ! (전민동성당 강론 2019.9.15.)

신앙,믿음.

그 끝자락은 무엇일까?

신앙과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없다 했는데, 저와 여러분은 지금 왜 여기에 나와 있는가?

여러분! 왜 여기에 머물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고자, 무엇을 얻고자,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과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왜 성당엘 다니십니까?

이 물음에 저는 이런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신앙과 믿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을 대면’하기 위함“이라고..

‘주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주님을 면전에서 뵙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뵙는다는 것. 주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여러분이 신앙과 믿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이 자리에 머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주님과의 대면’입니다.

주님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대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구원은 결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과 믿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부와 명예와 권력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고자 하는 것을 신앙과 믿음을 통해 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신앙이, 믿음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라 천상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 것을 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과의 만남이, 주님과의 대면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저 성당에만 나오기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은 이 자리에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주님은 우리의 오감으로 감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지요.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혹은 저기에 계시다.’라고 말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주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그러한 양식으로 존재하시는 뿐이 아니시니까요.

“떠남!”(떠난다).

이 단어는 신앙인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회피할 수 없는,외면할 수 없는 단어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떠남’을 통해서만이 주님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서 무엇으로, 어디에서부터 어디에로의 떠남

이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요청되고 있는 초대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머문 자리에 연연하여 떠나지 못함으로 빚어진 수없이 많은 얼룩들을 말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와 비슥한 체험을 가지고 살아가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성공을 이룬 곳, 바로 그곳에 계속 머물기를.....

성공한 정치인, 성공한 기업인, 크고 작은 업적을 이룬 이들.

심지어는 종교 지도자들마저도 예외 없이 떠남을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삶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시시 때때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리고.

또 그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후회하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그런 삶에서 자유롭다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왈(子曰)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 했습니다.

이 말은 공(성공)을 이룬 곳에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는 공을 이룬 곳에 머물지 말라고 가르쳤을까?

그곳에 머물면 아마도 자신이 이룬 성공에 취해 결국에는

썩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그리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기저에도 떠남이 아주 짙게 깔려 있습니다.

떠나라 :

아브라함(유프라테스 강 상류 ‘우르’에 살고 있던 그에게 고행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이집트에 몸 붙여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 그들 역시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하느님의 자리,

곧 예언의 자리로 떠남을 실천했습니다.

신약의 사도들, 그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떠남을 끊임없이 요청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제로 혹은 수도자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떠남에 대한 남다른 묵상과 그에 따른 실천이 요구된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서,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가는 우리들이 매순간 생각해야할 숙제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우르’는 무엇인가?

우리 각자가 놓지 못하고 손에 움켜쥐고 있는 ‘이집트’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순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떠나야합니다.

비복음적인 상황에서 복음적인 상황으로 늘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재 상태에서 하느님의 현존의 상태로 늘 떠나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살으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진전한 의미의 믿음이고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떠남은 장소적 의미를 넘어서 상태적 의미의 떠남을 지향하고 있음을 개달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상태를 들여다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우르의 상태? 복음적 상태에 있는가를 늘 살펴야 한다는 다시 말해 나의 상태가 주님의 현존의 상태냐?

아니면 주님의 부재의 상태냐를 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에서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가?

시련은 하느님의 발걸음이요 십자가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제하고서 자신이 태어난 시간은 모두가 다 알지요.

여러분 다 자신이 몇 년 몇 월 며칟날 태어났는지 다 아시지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 몇 년 몇 월 며칟날 돌아가십니까?

자신이 죽는 시간은 알지 못합니다.

혹자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왜냐,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 다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이 역시도 죽음이다.

왜냐,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순간, 엘리사벳과 성모마리아의 만남을 생각해봅니다.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연(처녀가 아기를 임신한 사실)을 들고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둘의 만남은 일반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배불데기와 배불데기의 만남

하느님(예수님)과 인간(세례자 요한)의 만남인 것입니다.

기가 막힌 만남입니다.

절대절명의 순간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찾아 그녀와 만났습니다.

절대절명의 순간 여러분은 만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습니까?

그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시련의 순간 ,십자가를 만나는 순간 여러분이 만나야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세상 것들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행위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신의 바램과 지향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바램과 지향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엘리사벳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의 찬송의 속뜻은 바로 성모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인 나 중심의 생각에서 너,즉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행위,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며, 그것이 바로 떠남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늘 떠나는 자입니다.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비복음의 상황에서 복음의 상황으로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의 여정인 것입니다.

영원성에 기초하지 않은 것에 머물게 되면 썩어 버리게 됩니다.

끝없이 주님의 현존의 장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숙명이요 화두인 것입니다.

떠남과 머뭄에 관한 묵상을 안식년 생활 속에서 자주 해왔습니다.

떠남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머뭄은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정답은 알 것 같은데, 실천하기가 쉽지가 않음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의 더욱 깊숙한 그곳에,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자하시는 주님을 머물게 하심으로,

도 우리가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묾으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요청 드려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요한8,32)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셨고,

시련과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짊어지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완성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시련과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초대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견진성사 잘 준비하시고,

전민동 본당 공동체가 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사는

참신앙의 여정의 공동체이기를 미약하나마 기도하고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 한편을 읽으며 마치겠습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찾습니다.

주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 저의 삶이 옵니다.

제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제 남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잘 살지 아니하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잘 산다는 것,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주 작은 사건과 지극히 우연한 일들이 저를 이 자리로 이끌었고

이곳에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노력은 당신과의 만남으로, 당신과 함께 생활함으로써만

이뤄진다는 것을 매순간 깨닫고 기억하며 살게 해 주소서.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의 초청이 필요하듯

투미한 저를 위해 당신을 저에게 열어주시고

자유로이, 적극적으로 당신게 나아갈 수 있도록

제가 지닌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가

저를 당신께로 이끄는 고마운 이웃임을 깨닫고

그 안에 현존하는 당신 사랑에 눈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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