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인물은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다음으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였다. 그 두 사람은 수난 여정 3부 십자가의 길에서 바로 앞뒤를 같이 걷고 있었다. 세상적인 부와 지식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리라 여기며 해외에서 학업에 전념하던 시절, 건강상의 이유로 공부를 접고 신학교에서 마르코 복음을 수강 한 적이 있다. 그때 마르코 복음에만 나와 있는 인물,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가 복음의 저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필자의 말처럼 그 부분이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대목에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긴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예수와 관련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기 두려워 절대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그토록 절박하게 달아나지 않았던가? 본인이 발설하지 않으면 자신이 그 곳에 있다 도망친 것을 아무도 모를 텐데 왜 굳이 그 사실을 그 자리에 넣었을까?’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는 다음해 등록한 교리교사 과정 안에서 만난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느 과정에서 당시 상황과 주변인물을 떠올리도록 복음서의 그 부분을 설명 해주며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파스카 준비를 하고 있는지 먼저 묵상하도록 했다. 그런 후 예수님의 파스카 음식을 차릴 준비가 된 곳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라 했다. 그때도 역시 그 남자는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그런 주변 인물까지 상세히 묘사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후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을 때 가끔 그때의 기억과 의문이 떠올랐지만 잊고 지내다 이번 예수 수난 여정 안에 그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던 것이다.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 다양한 이들 안에 각기 다른 형태와 관점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를 보게 한다. 개인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전망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론적인 전망과 신적인 전망 안에서 보게 되는 십자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부담을 안고 사는 인간적인 삶에서 먼저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천년 전 예수 수난의 여정에 함께 한 인물들의 모습과 태도는 오늘 내 삶속에서 어느 부분 그대로 재현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삶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이 은총이라는 역설을 신앙의 신비로 믿게하는 실체가 되어 준다. 그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협조자로 여긴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묵묵히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도 있다. 주변인물로 하찮게 여겨지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성실하게 안내함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한 것이라는 묵상이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

'복음이란 긴 머리말이 붙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보고'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이나 부활의 기쁨보다 수난과 죽음, 즉 예수님의 수난사화에 중점을 둔 복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수난기의 절묘한 위치에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수난 체험을 넣은 마르코,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는 더 이상 자신의 고백이 부끄럽지 않다. '그리스도를 입은' 그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마르코의 특별한 사명은 누구도 표절할 수 없는 예수님의 증거자로서 복음서 집필의 선봉이 되는 것이었나 보다.

사순시기에 신앙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반복해서 읽게 되는 예수 수난기는 자유로운 사랑의 초대장이 되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모습과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은 매 순간 자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더욱 선한 모습으로 새롭게 살도록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실패한 듯 보이는 그분의 사명이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여 우리를 통해 증거 하게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