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도 얼마 있으면 끝난다.

예수님의 수난 여정을 묵상하며 지내는 이 시기에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 책에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대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집약돼 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죄들을 역력히 볼 수 있게 한다.

인물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라고 봐야 옳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교정되고 정화되어야 할 것들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시노드 설문 조사 결과 신자들이 신앙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로 '죄의식'이 첫 번째로 꼽혔다.

유다의 죄의식과 베드로의 죄의식은 천양지차이다.

잘못을 뉘우치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처단한 유다는

그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부정적인 죄의식을 가진 이의 대명사이고,

베드로는 똑같은 배반을 했음에도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와 첫 번째 교황으로서 수위권을 주님께 받게 된다.

긍정적인 죄의식은 이렇게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죄인됨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나아가게 한다.

결국은 각자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생사를 가르는 셈이니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 교정이 정말 중요하다 하겠다.


마르코 복음 필사의 해,마르코 복음 봉사를 하고 있는데,

평소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마르14,51-52에 나오는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에 대한 말씀의 기가 막힌 배치가 눈에 새롭게 다가온다.

성경이 진리 면에서 오류가 없다는 말이 수긍이 된다. 인간의 죄를 절대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에수님의 수난을 지켜보며 그분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결국 도망친 복음 사가의 부끄러운 고백이 이 짧은  두 절에 집약돼 있는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복음의 증인으로 가장 먼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음이 또한 주님의 쾌거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때가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너무 힘겨워 죽겠어서 그렇게 매달려만 있지 말고 빨리 내려 와서 나 좀 살려주시라고 좌도처럼 절규하던 때도 있고,

아무 죄도 없는데 바보처럼 돌아가시는 그분의 무력함 때문에 억울하고 답답한데다

그분을 믿겠다고 따라나선 제자로서 희생하고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을 그분께 원망하면서 도대체 왜 그렇게 돌아가신 거냐고 질문한 적도 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일러 주셨지만 '뭔 소리하셔...당신 땜에 미쳐 죽겠구만...' 이러면서

십자가 그 사랑에 대해 깨닫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었다.

그 이후로 더 강도 높은 상실의 아픔을 겪으며 나를 낫게 하시는 그분의 죽음이 매일 미사로 재현되고 있음을

그분의 죽음이 내 생명의 양식이 되고 있는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비로소 죽음과도 같은 어둠에서 파스카 할 수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 나를 살리시려고 손 내미시는 분을 바라보며

이제는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을 맘 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두 손은 분명히 힘있게 뻗은 '만세!'의 모습이다.


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이런 여정을 통해 내 안에서 그분이 혁명을 일으키셨기에 이런 내면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 믿는다.

시몬처럼 얼떨결에 그분의 십자가를 지다 그분을 알아보든

백인대장처럼 십자가 처형의 선봉에 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고 고백하든

우리 신앙 여정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보고 예수님처럼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도록 이끄시리란 믿음이다.


이런 신앙의 여정을 우리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복되다.

시노드의 여정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주님의 위대한 선물이다.